들어가며
진화론적 기업론은 제한적 합리성과 불확실성, 암묵성이 존재할 때 개인의 숙련 문제를 기업 조직에까지 확장시킨 것이다. 앞에서 배웠듯이 개인은 신고전학파 경제학이 가정하는 것처럼 효용 극대화의 기계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기업 역시 이윤 극대화의 기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진화론적 기업론은 이윤 극대화의 과정이 아니라 루틴을 기초로 기업을 파악한다.
루틴
루틴은 기업 내의 관행, 관습
조직 내에서 일상적이고 반복적으로 행해지는 모든 활동이 루틴이다. 루틴은 개인의 숙련과 비슷한 것이다. 개인이 제한적 합리성 때문에 숙련이라는 일종의 프로그램을 이용하듯이 기업은 루틴을 이용한다. 다시 말해서 루틴은 기업의 행동 프로그램이다.
기업은 루틴의 집합
루틴들이 모여서 기업이 할 수 있는 일을 규정하는데 기업이 할 수 있는 일을 기업의 조직적 능력이라고 정의한다. 개인의 숙련이 서로 다르듯 기업의 조직적 능력 또한 서로 다르고 바로 이 기업의 차별화된 조직적 능력이 기업의 존재 이유다.
조직의 메모리로서 루틴
개인과 마찬가지로 기업은 많은 지식을 지니고 있다. 시장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부터 시작해서 R&D와 관련된 각종 기술적 지식까지 다양한 지식을 지녀야지만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그렇다면 기업은 이러한 지식을 어디에 가지고 있는 것일까?
조직의 구성원들은 각기 여러 개의 행동 규칙을 가지고 있는 바 그 행동 규칙 자체가 지식의 저장창고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기업은 행동함으로써 기억한다. 조직의 구성원은 한 가지 방식으로만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내부 혹은 외부로부터 받은 메시지를 보고 해석한 후 여러 가지 레퍼토리 가운데 한 가지 방식으로 일을 행한다. 다시 말해서 루틴이란 일을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의미한다.
기업의 능력은 그 기업이 가지고 있는 공장, 설비와 함께 구성원이 가지고 있는 루틴과, 그 구성원들이 서로 의사소통할 수 있는 조정능력으로 구성된다.
선택과 능력
이상과 같은 설명을 통해서 루틴은 기업의 행동 규칙이기도 하고 기업의 능력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진화론적 기업관은 신고전학파와는 달리 기업의 선택과 능력을 분리하지 않고 루틴이라는 공통의 개념으로 이해한다.
탐색, 역량 그리고 경쟁
조직에서 루틴의 작동은 최고위층의 의식적인 선택에 의해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각 부분에서 자동적으로 루틴이 수행되는데 기업이 효과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여러 개의 하부 루틴이 효과적으로 통합되어야한다.
경영자는 때로는 루틴을 의식적으로 선택할 수 있고, 새로운 루틴을 찾기 위해 여러 가지 실험을 행하기도 하고 다른 성공적인 기업의 루틴을 모방하려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루틴은 복제하거나 모방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성공적인 기업이라고 해서 규모를 무작정 확대할 수도 없고, 다른 기업이 쉽게 역량을 모방할 수도 없다. 따라서 기업들은 역사에 따라 서로 다른 역량을 지닌다.
기업이란 바로 그 기업이 행할 수 있는 것으로 정의되며 개인의 인지적 한계를 넘어선 조직적 역량을 가지는 것이 바로 기업의 존재의의이다. 환경이 급격히 변할 때 환경에 맞는 루틴을 가지고 있는 기업은 계속해서 살아남거나 더 성장할 수 있고 환경에 부합하지 않는 루틴을 가지고 있는 기업은 도태되거나 점점 축소된다. 이와 같은 기업의 한계와 이질성이 자본주의에 있어 기업 간 경쟁의 본질이다.
진화론적 기업론
과정중심의 기업관
신고전학파 이론은 기업이 존재하는 이유를 가장 효율적인 제도를 선택한 결과로 설명한다는 의미에서 기능주의(functionalism)적이다. 진화론은 과정중심(process-oriented)의 이론체계이기 때문에 진화경제학자들은 기업이 존재하는 이유, 혹은 현재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는 이유보다는 기업이 현재 상태로 존재하게 된 과정에 더 관심을 가진다.
과정의 경로의존성
기능주의의 또 다른 형태는 어떤 존재의 현재 기능이 바로 그 존재가 탄생한 이유라고 보는 것이다. 신고전학파 기업 이론은 현재 기업이 존재하는 이유를 기업의 탄생 이유로 보는 몰역사적 설명방식을 가진다.
진화론적인 기업론은 기업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형태로 존재한다거나, 현재 기업의 존재 이유 때문에 발생했다는 두 가지 의미에서의 기능주의를 배척한다. 진화론적 기업론은 기업의 발생부터 진화과정을 설명함과 동시에 각 단계에서 어떠한 이유로 기업이 존속하게 되는지를 설명한다.
[!국가의 존재이유에 대한 기능주의적 설명방식]
예를 들어 현대의 민주 국가의 경우 루소가 말한 사회계약을 통해 효율적 제도로서 국가가 존재한다고 해도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최초 국가의 탄생 시기로 돌아간다면 사회계약론과 같이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국가가 성립된 경우는 지금까지 발견된 적이 없다. 따라서 국가의 탄생 배경은 현재의 국가 존재 이유를 떠나서 별개의 탐구 주제가 되어야 하는 것
기업의 발생
사람마다 새로운 사업기회에 대한 사고의 틀 혹은 인식의 틀이 다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쉽게 합의하여 협동 작업을 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남들에게 자신의 사고의 틀을 잘 이해시킬 수 있고 이런 사람들은 자신과 일할 수 있는 사람을 모을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리더쉽이다. 리더쉽을 통한 사업 구상의 공유를 통해 기업 구성원 간의 인식의 조정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동시에 같은 사업 구상에 동의하는 사람들로 이뤄진 집단이므로 인센티브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그런데 사업 기회에 대한 사고의 틀은 완전한 사업의 청사진이 아니라 사업 기회를 인식하는 대충의 방식일 뿐이다. 따라서 기업가가 자신의 사업 구상에 맞춰 자신의 인식에 동의하는 사람들과 시장에서 계약을 한다고 했을 때, 앞으로 일어난 일들을 모두 예측해서 완전한 계약을 하기는 어렵고 따라서 이 계약은 장기의 포괄적 계약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계약을 통해 이뤄진 조직이 바로 기업이다. 기업이란 같은 사고의 틀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며, 기업이 존재하는 이유는 인간의 인지능력의 불완전성과 복잡성 때문에 발생하는 불완비 계약 때문인 것이다.
복잡한 위계조직으로의 진화
처음 벤처 기업이 창업되었을 때에는 대부분의 작업이 소규모 작업그룹에 의해서 이뤄지고 사업 구상은 불확실하고 유동적이다. 작업 그룹의 업무 영역도 유동적이고 한 사람이 다양한 업무를 처리하고, 사업 구상에 대한 공유의 정도가 넓고 깊다. 업무의 영역이 불확실하므로 분업은 위험하다.
하지만 점차 사업 구상이 현실화 하면서 그 구체성이 커진다. 따라서 사업 구상 공유의 필요성은 감소하는 반면, 업무 영역을 확실히 할 수 있기 때문에 분업의 이득은 커진다. 따라서 점차 업무 영역이 분화되고 자신의 업무에 대한 숙련도가 증가한다. 고도로 분업화된 조직에서는 더 이상 모든 사람이 전체 과정을 이해할 필요가 없고 사업 구상도 공유할 필요가 없이 자신에게 할당된 작업만 이해하면 되고, 기업가, 혹은 일부 노동자들만이 전체적인 시스템을 이해하고 의사결정을 담당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기업은 고유의 영역을 가진 여러 부문들이 존재하는 복잡한 위계조직으로 발전한다. 1
위계조직이 존속하는 이유
업무영역이 확실해지고 분업이 확대되어 사업구상 공유의 필요성이 약해진다는 것은 기업의 존재이유가 점차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기업 조직과 생산물이 고도화함에 따라서 기업의 범위는 계속 축소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몇 가지 이유로 기업은 계속해서 유지되려는 관성을 지닌다.
동적 거래비용
만일 기업이 시장에서 거래를 하기로 결정을 했다면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이미 시장에 존재하는 기업에게 아웃소싱을 하는 것인데 원하는 부품이나 용역을 생산할 수 있는 기업이 시장에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다른 기업으로부터 부품을 조달하고자 한다면 이 기업이 자신에게 맞는 부품을 개발할 수 있도록 지식을 이전하고 개발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들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 지식의 암묵성 때문에 이러한 과정에는 많은 비용이 발생하는데 이러한 비용을 동적 거래비용이라 한다.
공통으로 사용하는 자원
기업은 시장에서 이미 존재하는 기업을 찾기보다는 스스로 가지고 있는 역량을 분리시키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2 하지만 공통으로 사용하고 있는 지식 때문에 분리가 어렵거나 많은 비용을 발생한다.
분리하려는 부문은 다른 부문과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자원 혹은 지식을 가지고 있을 수 있고 공통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지식이 기업의 분리를 곤란하게 한다. 만일 공통으로 사용하는 지식을 쉽게 복제할 수 있다면 분리에 장애가 되지 않겠지만 앞 절에서 설명하였듯 지식이나 루틴은 정확히 복제하거나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불완전한 형태지만 전달 가능할 경우에도 이것은 비용과 시간을 요한다.
기업가의 인지능력 한계로 인한 문제
기업은 간단한 생산물을 생산하는 작고 간단한 조직으로부터 복잡한 생산물을 생산하는 복잡한 조직으로 진화하였는데 이러한 진화과정은 처음부터 청사진을 가지고 의식적으로 행해진 것이 아니라 상당부분은 기업가가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루틴을 통해 이뤄진 것이다.
따라서 복잡한 위계조직으로서의 기업은 기업가의 인지 한계를 벗어나서 자동적으로 행해지는 루틴에 의해 행동하는데 제품을 완성하는데 필요한 부품이나 서비스를 더 이상 내부에서 생산하지 않고 시장에서 조달하려면 명시적인 계약을 통해 외부 기업에 맡겨야 한다. 그런데 복잡한 조직 내에서 기업가의 인지능력 한계로 인해 자동적으로 수행되던 수많은 작업들을 명시적으로 계약하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비용을 많이 수반한다.
의사결정의 효율성
기업의 발생을 리더쉽으로 설명하면 기업은 결국 의사결정의 위탁체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기업가의 중앙집권적인 의사결정은 생산물과 기업조직이 복잡해졌을 때에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위계조직으로서 기업의 특성은 생산방식, 기술개발의 방향, 작업의 할당을 기업가가 결정하여 하달하는 것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완벽하게 모듈화 되어 각각의 부품 개발은 개인이 독립적으로 해도 되고 나중에 아무 문제없이 이것들이 통합될 수 있다면 비교적 의사소통이 수월하다. 하지만 복잡한 생산물의 경우 각 부품들마다 다른 부품과 함께 개발되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제품이 복잡할수록, 부품들끼리 더 연관이 되어 있을수록 의사결정의 어려움은 더욱 커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앙집권적인 의사결정자가 존재하지 않고 공식적인 시장거래에 의존하게 된다면 의사결정의 비효율성이 대단히 클 것이다.
[!기업조직과 모듈성]
모듈성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기업조직과 혁신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는 기업조직과 모듈성에서 계속해서 알아보자.
새로운 컨셉의 창조
기존의 제품을 개량하는 일상적인 혁신이 아니라 새로운 컨셉을 창조하거나, 기존 역량을 파괴하는 혁신(disruptive)을 창출해내는 것에 있어서는 내부생산의 이점이 더 크다. 이러한 혁신은 기존에 존재하던 부품들의 작동방식 및 연결방식 자체를 완전히 바꾸는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여러 부문이 더 긴밀하게 지식을 주고받아야 하고, 효율적인 의사결정은 더욱 중요해진다. 이와 같은 연구개발 조정에 있어서는 내부생산이 시장거래보다 유리하다.
또한 새로운 컨셉을 창조하거나 파괴적 혁신을 하거나, 그로부터 만들어진 제품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때로는 각 부문들의 경계나 역할 등을 새로운 컨셉에 맞게 재구성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데 이러한 경우 시장에서 지식을 거래하고 있다면 재구조화가 대단히 어려울 것이다. 시장 거래자들은 모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지식의 이전이나 인력의 이동, 조직의 통폐합, 역할변경 등에 동의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식이 기업 내부에 존재하고 있다면 이러한 작업이 비교적 순조롭게 이뤄질 수 있다.
요약 및 결론
진화론적 기업론
진화론적 기업론에서 기업이란 최초에는 사고의 틀을 공유하는 의사결정의 위탁체였다고 할 수 있고, 기업의 존재 이유는 인간의 인지능력 한계와 복잡성 때문에 발생하는 계약의 실패 때문이다. 하지만 기업이 점차 복잡한 위계조직으로 변화하면서 기업은 복잡한 루틴의 집합체가 되고, 다시 말하자면 지식의 집합, 혹은 역량이 기업의 정의이다. 이 때 기업의 존재의의는 쉽게 분리할 수 없는 역량이다.
진화론적 기업론의 의의
진화론적 기업론의 가장 큰 특징은 처음부터 동학적이라는 것이다. 진화론적 기업론은 처음부터 기업 조직은 변한다고 가정을 하고 있고, 루틴의 복제, 모방, 혁신 등 이론 체계 안에 변화의 동인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기업 조직의 변화를 설명하는 데 있어 가장 적합한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진화론적 기업론에서 기업들은 서로 다른 역량을 지니므로 현실에서 기업들이 서로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는 점을 설명하기 용이하다. 현실에서 기업은 이질적인 역량을 지니고 있으며 이 중에서 더 환경에 적합한 기업이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기업은 도태된다. 좋은 루틴은 다른 기업에 의해 모방되지만 모방은 언제나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환경에 적합한 기업이라고 해서 그 규모를 순식간에 늘릴 수는 없고 따라서 적합하지 않은 기업이라 할지라도 상당 기간은 살아남을 수 있다. 이 때 환경은 늘 변하기 마련이고 또한 새로운 혁신이 늘 출현한다. 따라서 때로는 적합하지 않았던 기업이 환경에 더 적합하게 되는 일도 발생한다.
이러한 경쟁 양상은 자본주의 경제에 있어 실제 관찰되는 것과 부합하며, 진화경제학자들은 이러한 경쟁이야 말로 자본주의의 본질이라고 본다. 진화론적 기업론은 기본적으로 지식이 중심이고 혁신을 기업의 본질로 본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일상적인 유지, 관리가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산업에 대해서는 설명력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고, 주로 기술혁신이 빠르게 일어나는 산업에 잘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Foot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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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구상이 구체화되면서 생산물 또한 점차 복잡해진다. 사업구상이 구체화되기 이전의 생산물은 단순하고 한정된 기능만을 하며, 투여된 부품과 지식, 생산 장비는 범용이다. 하지만 점차 사업구상이 구체화되고, 조직이 복잡해지면서 기능이 추가될 수 있고 그 중 일부는 더 복잡한 구조를 통해 구현해야 한다. 공정 또한 분업화 되면서 전용 장비를 이용할 수 있게 되고 따라서 더 복잡하고 고도화된 공정을 통해 효율성 증대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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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은 새로운 사업 컨셉에서 출발하였다. 따라서 분리를 하려는 부분 역시 시장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고, 다른 기업들이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조직 역량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분리를 하게 되면 Williamson이 말하는 거래비용 발생의 조건인 소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하지만 거래비용이 항상 분리를 가로막는 것은 아니고 시장에 이미 비슷한 부품을 생산하고 있거나 비슷한 역량을 가지고 있어서 쉽게 해당 부품을 생산할 능력이 있는 기업이 존재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 경쟁체제를 이용할 수도 있고, 이러한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분리하려는 부문의 기회주의적 행동이 제한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