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로의존성이란?
경제학에서 경로의존성
경로의존성이란 경제적 결과가 단순히 현재의 조건이 아니라 과거의 경로에 의해 결정되는 상황을 일컫는다. 경로의존적인 상황에서는 역사가 중요하다.
기본적으로 신고전학파 경제학은 몰역사적이다. 현재의 상황은 주어진 조건 안에서 최적의 선택 결과로 설명된다. 만일 어떠한 조건이 변하면 최적의 선택은 변하지만 만일 그 조건이 원상복구된다면 원래의 상태로 돌아간다. 이러한 특성을 가역성이라고 한다.
경로의존적인 상황이라면 잠깐의 조건 변화라도 선택을 영원히 변화시킬 수 있다. 따라서 현재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조건 뿐 아니라 역사를 살펴보아야 한다. 역사적 과정은 비가역적이다.
생물 진화의 경로의존성
진화경제학(Evolutionary Economics)자들은 설명의 용이성을 위해 진화생물학 이론을 유비(類比)로1 사용하는 것을 즐기는데 경로의존성은 그 중에서도 핵심 개념이다.2
생물 진화와 경로의존성
최적화 과정으로서의 적응?
진화 생물학자들은 진화론을 옹호하기 위해 흔히 Orgel의 법칙으로 알려진 다음 인용구를 즐겨 언급한다. 3
Orgle's Second Rule
Evolution is cleverer than you are.

다윈의 핀치
다윈은 갈라파고스 섬에 사는 핀치들이 서로 다른 부리 모양을 가진 것이 서로 다른 먹이에 적응한 결과라고 설명하였다. 진화 생물학 서적은 얼핏 이해가 안가는 생물의 모습이나 행동도 알고보면 적응의 결과라는 설명으로 가득 차 있다.
이는 미시경제학 책이 일견 불합리해 보이는 인간이나 기업의 행동도 모두 최적화의 결과라고 설명하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 실제 일부 진화생물학자들은 무차별곡선을 이용하여 적응을 설명하기도 한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크루그먼은 진화생물학 책을 보면 최적화 과정으로 가득 차 있다면서 진화생물학에서 배워야 할 것은 경로의존성이 아니라 최적화의 아이디어들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진화 생물학 논문에 등장하는 무차별 곡선
암컷과 수컷의 양육노력과 그 효과를 나타내는 무차별곡선. 부모의 노력이 보완적일수록 암컷과 수컷의 모습이 달라진다. 4
생물의 진화는 최적화 과정이 아니다.
어떠한 진화생물학자들도실제로 생물의 진화가 신고전학파 경제학에서 말하는 최적화 과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진화생물학자들이 무차별곡선을 도입하는 것은 하나의 설명 방식을 경제학에서 빌려간 것일 뿐이지 실제 적응적 진화가 최적화 과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찰스 다윈, "종의 기원" 중에서
“자연은 비약하지 않는다. (Natura non facit saltus)“는 자연철학의 오래된 법칙이다.
날개나 아가미가 없는 인간이 생활 환경이 바뀌었다고 갑자기 날개와 아가미를 가질 수 없다. 지구 온난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도 광합성을 할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일은 없다. 적응은 과거에 쌓여 있는 적응의 흔적들에 의해 제약된다.
현재의 생명체가 왜 그 모습을 하고 있는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조건만 봐서는 안되고 역사를 봐야 한다.
생물 진화에 있어 경로의존성의 증거
인간의 눈은 오징어의 눈보다 설계가 나쁘다

오징어와 사람의 눈
사람의 눈(왼쪽), 오징어의 눈(오른쪽)의 설계가 더 합리적이다.
👁️ 맹점
인간은 누구나 시각적 맹점(Blind Spot)을 갖고 있다. 인간의 눈은 망막보다 시신경이 위에 있는데 시신경 다발을 눈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뚫어 놓은 구멍에 간상세포와 원추세포들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망막 위에 분포하는 혈관들도 그들의 그림자 때문에 여러 작은 맹점들을 만든다.
적응적 진화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 눈이 순간순간 조금씩 다른 각도를 보려고 끊임없이 가볍게 흔들리게 만들었다. 이같이 엄청난 양의 정보가 두뇌에 전달되어 끊임없이 분석 종합되는 덕분에 우리는 우리 시야에 있는 영상을 지속적으로 보고 있다고 느낄 뿐이다. 잘못된 설계를 근본적으로 뜯어 고치진 못하고 그저 보완책을 강구한 것이다.
이른바 역망막(inverted retina) 현상은 때로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대수롭지 않은 출혈도 망막에 커다란 그림자를 만들 수 있어 심각한 시각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 또 간상세포와 원추세포들이 망막으로부터 쉽게 분리되어 눈 안으로 떨어지기 십상이다. (망막 박리) 일단 이런 증상이 발생하면 그 진행속도가 점진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빠른 시일 내에 수술을 받지 않으면 시각을 완전히 잃을 수도 있다.
오징어의 눈은 시신경이 망막 뒤에 있는데 인간의 눈보다 훨씬 더 합리적으로 설계되어 있는 셈이다. 만일 완벽한 눈을 설계하는 사람에게 상금 1억 원을 주겠다며 공모를 했을 때 멀쩡한 망막에 구멍을 내는 설계도를 제출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 **왜 인간의 눈은 이렇게도 불합리하게 만들어졌는가? **
문제는 바로 인류가 거쳐온 진화의 역사에 있다. 뒤집힌 망막의 설계는 인간만의 문제가 아니라 거의 모든 척추동물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이다.
척추동물의 눈은 작은 조상동물들의 투명한 피부 밑에 있었던 빛에 민감한 세포들로부터 발달했다. 당연히 이 세포들에 혈관과 신경들이 연결되어 있었고, 그 상태에서는 다분히 합리적인 설계였을 것이다.
하지만 수억 년이 흐른 오늘에도 빛은 어쩔 수 없이 혈관과 신경들을 지나쳐야만 시각세포에 도달할 수 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설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진화에는 이처럼 **역사적 제약(historical constraint) 또는 계통적 제약(phylogenetic constraint)**이 있다.
목이 길어 슬픈 동물 기린

기린과 상어의 미주신경
포유류의 후두신경은 미주신경으로부터 나오는데 심장 근처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목 윗부분으로 올라오는 이상한 구조로 되어 있어서 되돌이 후두신경이라고 부른다.
이는 후두신경이 동맥관에 꼬여 있기 때문인데 목이 없었던 우리 조상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문제고, 오늘날의 어류 등 목이 없는 우리 동족들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인간은 그나마 목이 짧기 때문에 그냥 이상한 설계다 하고 넘어갈 문제지만 기린의 경우 되돌이 후두신경이 4.6미터나 우회해서 후두로 가야 한다.
굴절진화 (Exaptation)

벨로키랍토르
최신의 학설에 따라 깃털을 잔뜩 가진 상상도이다.
경로의존성은 꼭 나쁜 결과만을 산출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은 비약하지 않기 때문에 때로는 어떠한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먼저 다른 무엇인가가 이루어져야 할 때가 있다.
새의 깃털은 처음부터 비행에 도움이 되도록 만든 것이 아니라 새의 조상들이 보온을 위해 고안한 것이었다. 만일 새의 조상들이 보온용 깃털을 고안하지 않았다면 오늘 날 날짐승은 익룡이나 박쥐 같은 깃털 없는 종류들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진화의 결과가 원래 용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진화하는 것을 굴절진화라고 부른다.
Foot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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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alogy. 두 개의 사물이 여러 면에서 비슷하다는 것을 근거로 다른 속성도 유사할 것이라고 추론하는 일. 서로 비슷한 점을 비교하여 하나의 사물에서 다른 사물로 추리한다. (표준국어대사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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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진화경제학자들은 단순한 유비의 수준을 넘어서 생물 진화와 경제 진화 과정을 같은 것으로 보고 생물 진화의 개념들을 경제 진화에서도 찾으려고 노력한다. 일례로 생물학에서 유전자 단위가 경제학에서는 무엇인가로 논쟁하기도 한다. 이러한 학자들은 “진화”라는 단어를 진화생물학에서 쓰이는 특수한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반대하면서 생물학과 경제학은 유비의 관계일 뿐이라고 받아들이는 학자들은 진화를 비가역적인 변화의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생태계 뿐 아니라 우주도 진화하고, 경제도 진화하고, 도시도 진화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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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는 이렇게 복잡하고 완벽한 기능을 만들 수 없어”와 같은 공격이 있을 때 잘 사용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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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fspring: Human Fertility Behavior in Biodemographic Perspective, National Research Council (US) Panel for the Workshop on the Biodemography of Fertility and Family Behavior; Editors: Kenneth W Wachter and Rodolfo A Bulata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