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교도들은 특별히 검소했을까?
🎨 네덜란드 황금기의 회화
신교는 가톨릭의 사치스러운 교회 장식을 경멸했으므로 자연스럽게 당시 미술의 최대 후원자였던 교회의 후원은 사라졌다. 네덜란드는 17세기 신교 지역 중 유일하게 회화가 번창했는데 부유한 부르주아들 덕분이었다. 집안이나 사무실, 식당 등을 장식하기 위해 많은 미술품을 구입하였고, 그 결과 풍경화와 정물화가 발달하여 이 시기는 미술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

명나라 도자기
Willem Kalf - Still-Life with a Late Ming Ginger Jar: 껍질을 까다 만 레몬은 물질의 덧없음을 의미하지만 명나라 도자기와 프랑스 남부에서 온 와인 등은 사치스러운 부르주아들의 취향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 18세기 영국 상류층의 미술품 애호
18세기 영국 상류층은 이탈리아 회화와 프랑스 와인의 주요 소비자였다.
곰브리치, "서양 미술사" 중에서
벌링턴¹시대 상류 사회 신사들은 청교도적인 이유를 내세워 그림이나 조각을 반대하지는 않았으나 그들은…… 본국의 미술가들에게 작품을 의뢰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저택에 걸 그림을 원할 경우 유명한 이탈리아 화가의 이름이 들어 있는 그림을 사려했다. 그들은 당대의 화가들을 외면한 채, 스스로를 미술품 감식가로 자처했으며 또 그들 중 일부는 옛 거장들의 훌륭한 걸작품들을 수집하기도 하였다.
¹ 18세기 영국 귀족
🎻 음악가를 모시기 위해 큰 돈을 쓰는 신교도들
칼뱅파인 네덜란드는 음악을 금기시한 칼뱅의 영향으로 음악에 큰 관심을 쏟지는 않았다. 하지만 루터는 스스로 음악에 많은 관심을 보였고 그 영향이 바흐까지 이어진다. 루터파였던 독일에서 근대 음악이 꽃핀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게오르크 텔레만¹이 요한 폰 우펜바흐²에게 보낸 편지 중 (1721년)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는 음악이 내리막길을 걷고 있지만 여기서는 꾸준히 오르막길을 걷고 있지요. 제가 보기에 함부르크보다 음악가의 심신에 자극이 되는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렇게 된 큰 요인을 보자면 여기는 귀족이 많을 뿐 아니라 시의 원로와 참사회 모두가 대중 공연을 보러 옵니다. 그들은 수많은 전문가들과 똑똑한 이들이 내리는 분별있는 판단에 매혹되는 것이지요. 게다가 이제 오페라는 활짝 꽃피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곳 음악 애호가들은 가지고 있기에는 신경쓰이는 물건을 자기들 수중에 들러붙게 놔두는 법이 없지요.
¹ 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은 18세기 독일 바로크 음악을 대표하는 음악가이다. 오늘 날에는 그리 잘 알려진 인물이 아니지만 당대에는 바흐보다 훨씬 잘 알려진 음악가였다. 한 동안 잊혀졌다가 현대에는 원전 음악 붐과 함께 활발히 연주되고 있다.
² 요한 프리드리히 아르만트 폰 우펜바흐는 제국 자유도시였던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의 시 참사관이었다. 부유한 도시 귀족의 후손이던 요한 폰 우펜바흐는 당대 예술의 후원자로 널리 알려져 있는 사람이었다.
합리성, 근검절약, 투자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14세기 베네치아 상인들은 일견 훌륭한 근대인으로 보이나 산업혁명 오래 전에 살았던 가톨릭 교도였다. 실제 합리적인 소비, 근검절약에 대한 강조는 세계 어디서나, 어느 시대에나 발견할 수 있다.
아함경 중 "싱갈라를 가르치다" 편에서
그리고 재산을 4등분으로 나누어라
(중략)
그 가운데 4분의 1은 자신을 위해 써라
4분의 2는 일을 위해 써라
나머지 4분의 1은 저축하여라
어려움을 당할때 반드시 쓸모 있으리라
근본적으로 자본축적 자체가 산업혁명의 직접적 원인이라 볼 수 없다. 열성적으로 돈을 축적하고 투자한 베네치아인들과 네덜란드인들이 산업 혁명을 일으키지는 못하였다. 앞에서 살펴봤듯이 축적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나 존재했다.
신교와 구교의 혼재-독일
독일은 한 국가 안에 신교와 구교가 혼재되어 있어 좋은 자연실험 대상이다. 1300-1900년까지 독일의 성장에 신교의 발생과 확산이 영향을 주었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다는 최근의 연구 결과가 있다. 계량경제학적 방법으로 신교의 영향을 찾아보려 했으나 어떠한 방법으로도 신교가 독일 경제 성장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