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상 자본축적도 단순한 축적이 아니다.
신고전학파 경제학에서 자본장비율은 선택의 문제에 불과하지만 학습론자들은 자본장비율은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현재의 자본장비율 이상의 구간은 아직 한 번도 실행해본 적이 없는 미지의 구간일 뿐이다.
선발국으로부터 기계와 공장을 사오더라도 그것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지식을 학습 (Learning)해야만 성장이 가능하다. 투자율이 높더라도 학습 능력이 떨어진다면 경제 발전으로 이어질 수 없는 것이다.
[!자본장비율의 선택]
신고전학파에서 자본장비율이란 주어진 생산함수를 바탕으로 한 선택의 결과일 뿐이다. 축적론에서 경제성장이란 자본투입량이 증가하면서 생산함수를 따라 생산량이 증가하는 것을 의미한다.신고전학파식으로 말하자면 성장은 노동과 자본 투입양의 선택에 불과하고 저개발은 선택의 결과이거나 선택의 결과가 나타나기까지 시간적 지연의 결과일 뿐이다.
등량곡선
암묵적 지식과 기술 추격
신고전학파 경제학이 상정하는 것처럼 경제발전이 단순히 요소축적의 문제가 아닌 것은 기술추격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술추격이 쉽지 않은 이유는 지식이 가지는 암묵성 때문이다.
명시적 지식과 암묵적 지식
- 명시적 지식: 쉽게 글로 표현되거나 부호화되는 지식
- 암묵적 지식: 부호화되기 어려운 암묵적 지식
지식의 암묵성 때문에 기업은 다른 기업의 지식을 완벽히 인식할 수 없으며 그 때문에 모방을 이용한 추격이 쉽지 않다. 새로운 자본장비율 하에서의 생산을 위해서는 시행착오와 학습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다음의 인용문은 현대자동차가 추격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와 노력을 통해 기술력을 확보하였는지를 보여준다.
Nathan Rosenberg, "Insider Blackbox" 중에서
전문 컨설팅업체의 컨설팅과 훈련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엔지니어들이 처음 엔진의 프로토타입을 만들 때 14개월 동안 시행착오를 반복해야만 했다. 하지만 첫 번째 프로토타입은 테스트에서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거의 매주 새로운 프로토타입이 생산되었지만 모두 깨졌다. 아무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고 현대의 경영진들마저 현대가 엔진을 개발할 능력이 있는지에 대해서 회의적이었다.
엔지니어들은 결국 열일곱 개의 엔진 프르토타입을 만들고서야 테스트에서 깨지지 않는 엔진을 만들 수 있었다. 그 동안 2,888개의 엔진 디자인이 바뀌었다. 현대가 자연흡기 엔진과 터보차져 엔진을 개발하기 전에 97개의 엔진이 테스트용으로 생산되었다. 더구나 1992년 현대가 완성품을 만들기까지 200개의 시험용 변속기와 150개의 시험용 차가 생산되었다.
혁신으로서 산업혁명
동아시아의 기적에 대한 축적론 비판은 산업혁명에 대한 축적론에도 그대로 적용 가능하다.
산업혁명 이후 자본의 투자는 여러 가지 기계 장치의 형태로 이루어졌는데 대부분 산업혁명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것들이다. 투자할 자본이 있으면 자동으로 증기기관이 개발되고 자동 인쇄기가 개발되는 것일까? 투자의 수익성을 올려서 축적을 할 수 있게 한 것은 기술혁신이었다.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학습이 필요했다면 산업혁명기 영국에게는 혁신이 필요하였다.
[!발명과 혁신]
한국 경제 발전에 대한 선구적인 연구자인 앨리스 암스덴은 “Aisa’s Next Giant: South Korea and Late Industrialization”에서 영국은 발명(Invention), 독일은 혁신(Innovation), 동아시아 국가들은 학습(Learning)을 통해 성장했다고 지적하였다.암스덴의 통찰은 훌륭한 것이나 발명과 혁신을 구분하는 것은 애매한 일이다. 실제 혁신 없는 발명은 경제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 이에 대해서는 기술혁신의 경제학 수업에서 자세히 다룬다.
학습론
실증적으로 동아시아 국가들의 높은 성장이 물적, 인적 자본의 축적으로 설명된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축적이 가능했던 것은 이들 국가가 높은 학습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학습(혁신)이 어떠한 환경 하에서 가능하고, 학습(혁신)을 촉진하는 정책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분야가 후발국이 선발국을 따라가는데 유리한 것인지 등이 학습론자들의 주요 관심사이다.
[!능력과 선택의 구분]
신고전학파 경제학은 기업의 능력을 생산함수 로 정의하고 선택 가능한 노동과 자본의 조합 중에서 가장 효율적인 것을 선택한다고 본다. 하지만 학습론은 능력과 선택을 구분하지 않는다. 학습론은 기업에서 이뤄지는 많은 선택이 의식적이 아니라 자동적으로 루틴에 의해 일어난다고 보는데 이에 따르면 잘 선택할 수 있는 것이 곧 능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학습은 새로운 루틴을 배우거나 개발하는 것이다.기업에 대한 이와 같은 관점은 개인의 선호와 선택을 분리하지 않는 행동경제학의 관점과 일치하는데 자세히 알고 싶은 학생은 여기를 참고하라. 학습론적 기업 이론 자체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싶은 학생은 기술혁신의 경제학 수업을 수강하면 된다.
총생산함수: 지나친 단순화
학습론자들은 총생산함수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총생산함수는 경제 내의 모든 산업을 하나의 함수로 표현함으로써 산업구성이 가지는 의미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동아시아 국가들은 성장 과정에서 급격한 산업구조의 변화를 겪었다. 크게 보면 성장 초기에 공업의 비중이 급격히 증가하였는데 공업 내에서도 비교우위를 가진 산업이 급격히 변화하였다.
한국의 경우 최초에는 섬유, 가발 등의 산업이 발달하였으나 곧 석유화학, 조선 등 중화학 공업이 급격히 발달하였으며, 최근에는 자동차, 전자 등의 산업으로 주력 산업이 옮겨오고 기존의 섬유, 가발 등의 산업은 쇠퇴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단순한 축적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 학습론자들의 의문점이다. 한국의 예에서 보듯이 새로운 비교우위를 창출하는 것은 자동적인 과정이 아니라 많은 노력과 시행착오를 거쳐야 가능한 일이었다.

한국의 수출품 구성 변화

삼성의 매출액 구성 변화
[!삼성의 반도체 진출]-
오늘 날 한국 경제에 가장 중요한 산업이 반도체임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농업 국가였던 한국은 어떻게 해서 최첨단 산업의 중심지가 되었을까? 자본 축적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였을까? 역사는 그 과정이 결코 자연스럽지 않음을 보여준다.한국에서 최초로 반도체를 직접 생산한 것은 1973년 한국반도체였는데 이는 재미 한국인인 강기동 박사가 “고국 산업 발전을 위한다는 일념”으로 행한 일이었다. 한국반도체는 삼성에 인수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 처음에는 주변의 만류로 이건희 회장이 개인적으로 인수하였다가 후일 삼성전자가 인수한 것이다.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의 회상
선대 회장은 여러 큰 사업을 일으키셨지만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가시는 신중한 분이셨습니다… 반도체 사업은…리스크가 큰 데다…삼성이 해왔던 사업하고는 개념 자체가 달랐던 거죠. 그래서 제가 우선 사재라도 털어서 시작하겠다고 말씀드리고…
삼성 인수 후에도 반도체 생산은 희망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과감한 투자와 연구개발을 이어갔다.
김광호 전 삼성 부회장의 회상
초유의 반도체 불황으로 2공장조차 1년 가까이 가동을 못 하고 있었는데 3공장을 지으라니 정말 난감했습니다. 1974년 한국반도체 인수부터 거슬러 올라가면 10년 넘게 적자를 보고 있었고 언제 흑자로 돌아설지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는데 말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3공장을 지으라는 건 누가 봐도 너무 무모한 거였습니다. 주변에선 ‘이제 호암도 나이가 드셔서 판단이 흐려진 것 아니냐’는 말까지 돌았습니다.
삼성에게는 다행스럽게도 3공장이 완공될 즈음에 반도체는 초유의 호황에 접어들었고 삼성은 나홀로 공격적 투자를 한 덕을 톡톡히 보았다. 삼성의 공격적 행보는 단순히 투자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기술개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김광호 전 삼성 부회장의 회상 1 하자고 하니 다들 뒤로 나자빠졌지요. 당시 일본 샤프가 우리 쪽 공장 설비 기술을 제공하고 있었는데 자기네들도 5인치 기술밖에 없다면서 난처해했어요. 하지만 선대 회장이 물러서지 않으니 결국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도체 값 폭락으로 만들수록 손해를 보는 상황에서…이번에는 웨이퍼까지 6인치로
기술 개발에 대한 삼성의 공격적 판단은 결국 성공하여 1990년대 초반 메모리 반도체의 선두주자로 올라서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