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람들은 “그냥” 눈사람을 일으켜 세웠을까?

김동식 "작은 눈 사람" 중에서

“신이 가끔 인간을 테스트한다지 뭐야? 이 종자들을 없앨까 말까 결정하려고.(…)가장 근래에 신이 인간을 테스트한 건 몹시 추운 겨울날 아침이었다더군. 신은 도시의 출근길 한편에 작은 눈사람을 하나 눕혀두었대.(…)아무것도 아닌 그냥 옆으로 쓰러진 작은 눈사람. 그게 테스트였던 게지. 그리고 인간은 그 테스트를 통과했다더군. 어떻게? 출근하던 사람 중 누군가 잠깐 멈춰 서서 쓰러진 눈사람을 똑바로 세우고 지나갔거든.
“뭐예요 그게?”
안듣고 있을 것 같았던 청년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뒤돌아보았고, 중년 남성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날 신은 두 번 더 눈사람을 쓰러뜨려 놓았는데, 두 번 다 지나가던 누군가 일으켜 세웠다더군. 그 모습이 신이 보기에 좋았던 게지. 재밌지 않아? 고작 작은 눈사람을 일으켜 세운 일이 인간의 종말을 막았다는 사실이…바쁜 출근길에 굳이 쓰러진 눈사람을 세우고 간 사람들 말이야. 왜 그랬을까?”
“그거야…그냥 했겠죠, 쓰러져 있으니까 그냥”
“그래 맞아. 분명 그랬을 거야.”(…)
“사실이고 뭐고, 윽! 빨리 와서 이것 좀 잡아줘요! 1분 1초가 아까운데 무슨 배짱으로 쉰대!”(…)
“미안하네. 자네들을 보니까 조금은 쉬어도 될 것 같더라고.”
“미쳤어요?”
“그럼 하나만 묻지. 자네들은 왜 여기 지원했나?…방사능 피폭으로 죽을 거란 걸 다 알면서도 지원하지 않았나? 왜 바로 뛰어들었지?(…) 아마 그냥일 거야. 원전 폭발을 막아야하니까 그냥. 그래서 내가 자네들을 보고 조금은 쉬어도 될 것 같더라고. 인간은 아직 멸망하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야.”

왜 사람들은 그냥 눈사람을 일으켜 세웠을까? 다마지오에 따르면 그냥 눈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이 불편한 감정을 일으켰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고, 카너먼에 따르면 시스템1에 의해 자동적으로 하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은 도덕적, 이타적 행동을 할 때도 합리적 숙고보다는 자동적으로 그러한 판단을 내리고는 한다. 이를 조너선 하이트는 직관적 도덕 판단이라고 불렀다.

직관적 도덕성

사실 도덕적 행동을 자동적, 직관적 반응으로 해석하는 것은 많은 사상가들에게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 아리스토텔레스 – 선택은 습관과 품성의 결과
우리는 흔히 "나는 정의로운 사람이야"와 같이 도덕을 선호나 생각으로 정의하려고 한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도덕은 생각이 아니라 반복해서 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따르면 도덕은 이성의 독립적 산물이 아니라 에토스(품성) 습관된 행위의 결과다. 다시 말하면 도덕성은 선호가 아니라 형성된 성격과 습관의 결과물인 것이다.

🤯 흄 – 이성은 감정의 노예
데이비드 흄은 이성은 감정의 노예라고 주장했다. 흄은 18세기에 이미 인간은 감정(동기)의 작용 없이는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간파했고, 이성은 그저 수단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놀랍게도 현대 뇌과학의 입장과도 정확하게 동일한 주장이다.

🏯 공자 – 인(仁)은 선택이 아니라 습관과 성정
유교의 인간관은 인간이 본래 도덕적 본성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사회화된 습관과 정서적 내면을 통해 드러난다고 본다. 인의예지는 계산해서 선택하는 덕목이 아니라 내면화된 반응 체계이다. 공자의 "군자는 보고 듣는 것이 곧 행함"이라는 말은, 선택은 계산 이전에 품성에 따라 자동화된다는 것을 뜻한다.

🧵 몽테뉴 - 나는 나를 모른다.
프랑스 르네상스의 대표적 작가인 몽테뉴는 이미 16세기에 우리는 선택한 후에야 그 선택의 이유를 안다고 인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기 성찰과 관용의 철학을 전개하였다.

🤖❌ + 🧍❤️ 아마티야 센 - 도덕은 형성되고 수정되어야 하는 것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아마티야 센은 도덕은 선호 혹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그에 따르면 도덕적 판단은 내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 공공규범, 다른 사람들도 같이 행동해도 되는지 등과 관련된 숙고의 결과 형성되고 또 수정되는 것으로 봐야지 선호-정보-선택 구조로는 도덕적 행동의 진정한 의미를 포착할 수 없다.

합리주의의 전통

그렇다면 우리는 왜 선호-정보-선택 패러다임에 익숙한 것일까?

🧠 계몽주의와 합리주의 전통
17세기~18세기 계몽주의는 "이성은 만능이다"라는 신념을 중심에 둔다. 인간은 자율적이고 이성적인 존재이며, 충분한 정보와 숙고를 통해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데카르트, 칸트, 밀, 스미스, 벤담까지—모두 인간을 이성적 선택 주체로 정의했다. 이러한 철학은 단지 이론이 아니라, 교육·법·정치·경제 시스템에 깊숙이 내재되었다.

💰 근대 경제학의 형식화가 만든 ‘모델’의 힘
18세기 합리주의를 이어 받은 경제학은 19세기 말부터 수학화되기 시작한다. 경제학자들은 현실을 단순화해서 수학적 모델로 만들기 위해 정의 가능하고 계산 가능한 구조를 만들기를 원했고 그 때문에 인간을 합리적 주체(Homo Economicus)로 간단히 가정하고, 선호-정보-효용 극대화 선택이라는 구조를 만들었다.

🧾 현대 교육을 통한 내면화
교육은 끊임없이 이렇게 가르친다. “목표를 세우고, 정보를 수집하고, 대안을 비교해서, 최선의 선택을 하라." 그러다 보니 우리는 선택을 하기 전에 반드시 ‘내가 뭘 원하는지’ 정의해야 한다고 믿게 된다. 실제 인간은 대개 선택을 한 후에야 뭘 원하는지 알아가는 존재에 가까운데도 말이다.

[!도덕적 선택에 대한 감정론과 이성론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
감정론을 통해 우리는 나 자신도 감정에 휘둘리는 존재임을 자각할 수 있다. 여기서 출발해서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해서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이해를 해보려는 태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그친다면 극단적 상대주의로 나아갈 수 밖에 없다.

모든 사람이 감정대로 행동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보편화 가능한 원칙을 찾을 수 밖에 없다. 다행히 내가 옳지 않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과 함께 무엇이 옳은지 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대화의 기준은 각자의 감정은 자제하고 이성적 판단에 두어야 한다. 우리는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 없지만 정당성은 이성에서 찾아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