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차
수차는 고대 로마 시대에도 제분에 사용되었다. 하지만 중세 후기에는 수차의 수와 이용범위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중세 후기 수차를 이용한 제분기는 훨씬 정밀하고 강력하게 개량되었다. 14세기부터는 종이를 만들 때, 화로용 풀무와 해머를 작동시키는 데에도 사용하게 되었다. 산업혁명 초기 방적기는 수차로 구동되었는데 이미 13세기 잉글랜드, 프랑스, 플랑드르에서는 짠 천을 두들겨서 단단하게 만드는 과정(풀링fulling)에 수차를 사용하였다.1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수차가 새로운 용도로 확장된 것이 아니라 크랭크, 캠, 기어를 이용하여 회전력을 복잡하고 정교한 메커니즘에 의해 복잡한 움직임으로 전환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중세 후기 이전 가장 기술적으로 앞서 있었던 것으로 평가되는 중국의 경우도 수차를 광범위하게 사용하였지만 기계의 사용은 단편적, 초보적이었고 중세 후기 유럽과 같이 복합적 시스템으로 기계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18세기 미국의 톱질 수차
Oliver Leonard’s Mil, Maine Forest and Logging Museum in Bradley, Maine, USA
크랭크와 기어, 도르레를 복합적으로 사용하여 정확한 움직임을 만들어낸 것을 볼 수 있다. 화면에는 안나오지만 목재의 움직임도 기계로 제어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캠을 썼을 것이다. 이 수차는 18세기 미국의 것이지만 중세후기 유럽에서 이미 쓰였음을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동력원도 강이나 냇물의 힘에만 의지하지 않고 베네치아에서는 조류의 흐름을 이용한 수차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저지대[^저지대]에는 풍차가 도입되었는데 기존의 용도 외에도 간척지 개척에도 사용하기 시작했다.
시계
수차에 사용된 정밀 기계 지식은 기계식 시계로 이어졌다. 12세기에 이미 쾰른에는 시계공 길드가 생겼고 14세기 쯤 되면 서유럽 대부분 도시에 기계식 시계가 설치되었다. 이 당시 시계는 무게추를 동력으로 사용하여 복잡한 기어 구조로 되어 있었다. 정확도는 그리 높지 않아서 하루에 15분 정도의 오차가 있었다.
15세기에는 태엽이 등장하면서 휴대가 가능해졌고 곧 귀족과 부르주아의 장신구 목록에 추가되었다. 금세공 장인과 기계 장인의 결합 덕분이었다. 시계의 발달은 천문학, 신학, 철학과 결합하면서 근대성의 상징이 되었으며 노동 규율에도 강한 영향을 미쳤다.2

독일 프라이부르크의 시계탑
구시가가 잘 보존된 유럽 도시에는 시계탑이 흔하다. 대부분 현재 남아 있는 시계는 근대부터 현대에 걸쳐 복원한 것이지만 기록 상으로는 13-14세기에 처음 제작되었다.
유리
15세기 베네치아 공화국 무라노 섬의 유리 장인들3은 유리 제조의 일대 혁신을 일으켰다. 레반트에서 수입한 재료들을 이용하여 기존보다 훨씬 투명한 유리를 제조하는데 성공하여 전 유럽의 유리 시장을 석권하였다.
베네치아는 산업 비밀을 보호하고자 했지만 무라노 장인들은 금전과 작위 혜택을 노리고 전 유럽으로 이주했고, 유리 제조 비법에 대한 책도 여러 군데서 출판되었다. 17세기에는 잉글랜드와 보헤미아에서 베네치아 유리보다 더 투명한 유리를 더 낮은 가격에 제조하면서 베네치아의 독점은 완전히 무너진다.

무라노 섬에서 제작된 샹들리에
17세기 유리 생산의 주도권을 빼앗기면서 무라노 섬의 장인들은 장식품 생산에 주력한다. 현재도 무라노 섬의 장인들이 유리 공예품을 생산하고 있어 무라노 섬은 베네치아의 주요 관광지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유리의 응용 제품
인류 역사 대부분의 시기 유리는 주로 장식품에 사용되었고 이는 무라노 장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중세 후기에는 성당이나 부유층의 저택 등에 작은 유리조각으로 만든 창문이나 조각을 납선(lead cames)으로 이어붙인 스테인드 글라스가 등장하였다. 이때까지 세계 유리 공업의 중심지는 비잔틴 제국과 아랍 세계였고 유럽은 기술을 수입하는 입장이었다.
13세기 말 이탈리아에서 안경이 발명되었는데 안경은 몇 안되는 중세 유럽이 남긴 고유의 발명품이다.[^발명의공유성] 14세기 후반 이미 베네치아에 안경길드가 존재했고 곧 스트라스부르[^알자스]에 세계 최초의 안경점이 생겼다. 안경의 발명으로 인간의 지적 수명이 대폭 증가했고 때로는 금세공업자들이 정밀 가공에도 사용하였다.
15세기 베네치아에서 투명 유리가 만들어지면서 안경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16세기 이후 현미경, 망원경이 만들어졌으며 화학 실험에 사용하는 용기들도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유리와 광학 기술의 발전은 과학 혁명의 필요조건이었던 것이다. 유리 제품을 통해 확인한 빛의 성질은 케플러와 뉴턴이 광학에 대해 깊이 탐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유럽에서 등장한 또 다른 유리 기술의 발전은 판유리 생산이다. 중세부터 불어서 만든 원반을 평평하게 누른 크라운 글라스(Crown Glass)라는 판유리가 생산되어 납선창에 사용되었다. 14세기 후반 무라노 유리 장인들은 유리를 실린더 모양으로 분 후 펴서 판으로 만드는 기법(Cylinder Blown Sheet)을 개발하여서 큰 창문으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이슬람 문화권에서도 장식적 요소로 창문 비슷한 것이 이용되기는 하였지만 본격적으로 건물의 필수적 요소로 창문이 이용된 것은 서유럽만의 고유 특성이다.4
인쇄술
14세기 목판 인쇄술이 동방에서 도입되었고 금새 전 유럽으로 확산되어 신문, 소책자 등이 인쇄되기 시작하였다. 이 때 종이도 급속히 보급되었다. 5
14세기 말에는 구텐베르크가 금속 활자를 개발했는데 불과 20년 사이에 전 유럽에 금속활자를 이용한 인쇄소가 생겼고, 책의 출판 역시 크게 증가하였다.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사회, 문화, 경제, 기술에 미친 영향은 그야말로 거대했는데, 너무 거대했기 때문에 여기서 다 논의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목판 인쇄술을 전해준 동양은 근대 들어서 서양의 인쇄술을 다시 받아들여야 했다.
Foot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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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에서는 풀링밀이 확산되자 일자리를 빼앗길 것을 우려한 노동자들의 반발이 일어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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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가 유럽인들의 세계관에 끼친 영향은 지대했다. 유럽인들은 시계를 통해 자율적이고 복합적인 움직임에 눈을 뜨게 되었다. 데카르트는 그의 기계론적 세계관을 설명하기 위해 시계를 비유로 사용하였고, 뉴턴 이후 이신론(신이 우주를 창조했지만 이후에는 개입하지 않는다는 신관으로 계몽주의를 대표한다.)은 “신은 시계를 만들고 태엽을 감은 뒤, 더는 손대지 않는다”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였는데 이는 단순한 비유 이상의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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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의 유리 공업은 12세기부터 번성하기 시작했는데 베네치아 본 섬이 아닌 무라노 섬에 있었다. 베네치아 관광을 가면 가이드들이 유리 제조 비법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무라노 섬에 가뒀다는 식으로 설명을 하고, 한국어 인터넷에도 그런 설이 많이 퍼져 있지만 원래 유리 공장은 베네치아에 있었다가 잦은 화재로 인해 무라노 섬으로 옮기기로 한 것이다. 그와 별개로 산업 비밀 보호를 위해 유리 장인들이 베네치아를 떠나지 못하도록 한 것은 맞는데 그렇다고 노예처럼 산 것은 아니고 유리 장인들은 베네치아의 상류층과도 결혼하는 등 사회적으로 괜찮은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본문에서 보듯 베네치아를 떠나지 못하도록 한 규정도 큰 효과는 없었던 듯 하다. 산업 비밀 보호는 현대 국가들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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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유리를 가마에서 바로 판 형태로 뽑아내는 기법(Drawn Glass)이 20세기 중반에는 액체 주석 위에 유리를 띄워서 판유리를 만드는 기법(Float Galss)이 등장하였다. 드로우 글래스는 연속적으로 유리를 뽑아내므로 이론적으로 무한히 긴 유리를 만들 수 있었고 미스 반 데어 로에는 이를 이용해 커튼월 스타일의 건물을 지을 수 있었다. 하지만 드로우 글래스는 여전히 울퉁불퉁했고 오늘날처럼 완전히 평평한 유리는 플로트 글래스를 통해 처음으로 실현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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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에서는 종이를 고대부터 사용하였지만 유럽에는 12세기나 되서야 스페인의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전래되었다. 12세기부터 기독교권 유럽에서도 종이가 생산되었지만 본격적으로 보급된 것은 14세기에 이르러서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