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과학적 인종주의

과학적 인종주의 혹은 생물학적 인종주의는 인종 간의 우열이 존재한다는 유사과학1적 믿음이다.

인종주의는 계몽주의 사상가들에게서도 많이 발견이 되나 본격적으로 “과학”2의 탈을 쓰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이다. 형질인류학 (physical antropology)자들은 주로 두개골 측정을 통해 인종을 분류하고 그 계층을 나누곤 했다. 이들은 각 인종들은 서로 다른 계통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인종을 서로 생물학적으로 다른 존재로 여겼다.

J.C. Nott가 저술한 Types of Mankind(1854)의 삽화
흑인(Negro)을 침팬지와 그리스인 사이의 위계로 보았다.

[!단계기원론과 다계기원론]
현생 인류가 여러 지역에서 독립적으로 진화했다는 입장을 다계 기원론 (Polygenism)이라고 하고 한 지역에서 현생인류로 진화한 후 세계로 퍼졌다고 보는 입장을 단계 기원론(Monogenism)이라고 한다. 19세기 형질인류학자들이 모두 다계 기원론을 지지한 것은 아닌데 다계 기원론은 성경적 근거와 맞지 않기 때문이었다.

19세기 말 다위니즘3, 사회진화론4, 우생학5과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과학적 인종주의는 이념적인 차원으로 확대되었다.

19세기 지식인들은 과학적 인종주의에 근거하여 식민 지배와 차별, 노예제를 정당화 하였다.

과학적 인종주의에 대한 현대의 논의

인종이라는 말은 조심해서 써야 할 개념이지만 지역 별로 유전자 풀이 다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지역 별 유전자 풀의 차이를 조사하고 이를 이용해 유전자 풀을 분류하는 것 자체는 과학적 활동이라고 볼 수 있고 이를 비난할 윤리적 근거는 명확하지 않은 듯 하다.

하지만 과학적 인종주의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

  • “과학적”이라는 이름과 달리 과학적이지 않다.
  • 윤리적으로 동의하기 어렵다.

과학적 인종주의의 윤리적 문제에 대해서는 링크에서 알아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과학적 문제에 대해서만 검토해보자.

현대 과학의 입장에서

과학적으로 황인, 흑인, 백인이라는 전통적 인종의 개념 자체가 부정되고 있다.

오늘 날 과학자들은 현생 인류는 여러 지역에서 독립적으로 진화한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의 좁은 지역에서 진화한 후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고 본다. 따라서 현생 인류 간의 유전적 차이는 아종으로 분류할 수준도 되지 못한다.

오늘날 과학은 유전적 형질과 후천적으로 형성되는 성격, 체질, 문화 등을 구분하지만 19세기에는 그러한 구분이 없었기 때문에 과학적 인종주의의 주장 중 무엇을 반박해야 하는지가 불분명하다. 과학적으로 보이려면 서구인들이 우월한 유전자를 가졌고 그 덕분에 빨리 발전할 수 있었다고 논의를 한정해야 할 것이다.

지역적으로 유전자 풀이 다른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하지만,

  • 특정한 유전자가 다른 유전자에 비해 우월하다는 것은 과학적 명제가 아니다.
  • 특정한 유전자가 발전에 더 적합했(하)다는 것은 증명되지 않았고, 증명되기도 어려운 명제인데 이런 명제를 남발하는 것은 전형적인 유사과학의 특징이다.

현대판 과학적 인종주의

현대의 일부 진화심리학78자들은 인간이 아프리카에서 출발하여 뻗어나갔는데 아프리카에 계속 산 사람들보다는 멀리 이주한 사람들이 좀 더 다양한 환경에서 선택압력을 받았으므로 더 우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증명되지 않았고, 증명하기 어려운 것을 “과학”의 이름으로 주장하는 유사과학적 주장9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주장은 증명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반례도 존재한다.

  • 가장 우수한 인종은 남아메리카에 살고 있어야 할 것이나 남아메리카는 서구인에 의해 “발견”되기 전까지 철기시대에도 진입하지 못한 곳이다.
  • 대만까지 왔다가 다시 마다가스카르까지 돌아간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은 또 어떤가?
  • 아프리카 사람들이라고 한 곳에서만 살았던 것도 아니고 아프리카 내에도 다양한 환경이 존재하고 상당한 사람의 이동이 있었다. 현재 아프리카에 사는 사람은 인간이 처음 생겨났을 때 그 사람들이 아니다.

코이산족의 분포
코이산족은 남아프리카의 수렵채집 민족이다. 이들은 유전적 다양성이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전자 분석 결과 이들은 가장 오래 전 다른 인류 집단과 갈라져서 오래 동안 고립되어 있다가 최근에 인류의 유전자풀에 합류했다. 그래서 가장 오래된 민족이라고도 하는데 과학적으로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지금 코이산족은 대부분 칼라하리 사막에 사는데 원래 여기서 살았던 것은 아니고 인류의 발상지인 동아프리카에서 남아프카로 이동해 온 것이다.

반투족의 이동 경로
반투족은 아프리카 전 인구의 30% 가량을 차지하는 아프리카 최대의 민족군이다. 반투어 중에서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언어로는 스와힐리어 가 있다. 반투족은 오늘 날 나미비아와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제외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대부분 지역에 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이들이 아프리카 전역에 살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기원전 천 5백년 전 쯤에 발원지(1)에서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2) 기원 전 500년 경에는 동반투인(3)들이 더욱 남하하였다. (4-7) 콩고에 살던 반투인(9)들은 마지막으로 0세기에서 10세기에 걸쳐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아프리카의 (쾨펜) 기후대
아프리카는 세로로 긴 대륙이기 때문에 다양한 기후대에 걸쳐 있다.

Footnotes

  1. 유사과학(Pseudoscience)은 과학이론처럼 보이나 과학적 방법론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은 믿음 체계를 일컫는다. 유사과학과 진짜 과학을 구분하는 문제(이른바 경계 설정 문제)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간단한 일은 아니다. 평평 지구론이나 지적설계론을 유사과학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과학자나 과학철학자는 드문 편이다. 하지만 SETI 프로그램이나 진화심리학은 일반인들에게는 과학 탐구의 첨단처럼 느껴지나 많은 과학자, 과학철학자들이 이들을 유사과학 혹은 유사과학과 진짜 과학의 경계에 있는 영역으로 여긴다.

  2. 사실 과학(Science)이라는 단어가 오늘 날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뜻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가 19세기이다. 영단어 Science의 어원은 라틴어 단어 Scientia인데 이것은 그냥 지식이라는 뜻이다.

  3. 유전되는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에 의해 생물학적 진화가 일어난다고 보는 찰스 다윈의 이론을 일컫는다. 다윈의 이론은 자연과학 이론이지만 인문, 사회과학 영역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4. 다위니즘의 자연선택, 적자생존의 개념을 사회의 영역에 확대 적용한 사회 이론이다. 다양한 시각들이 있었으나 대체로 강한 자의 약자 지배를 정당화하는 구석이 있었으며 훗날 나치즘의 토대가 되었다.

  5. 인간 종의 개량을 목적으로 선발육종에 대해 연구하는 유사과학이다. 믿기 어렵겠지만 19세기부터 20세기 초 서구에서 일어난 많은 정책들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예를 들어 미국과 독일의 이민 제한법, 정신이상자, 부랑자에 대한 강제 불임 수술 및 안락사, 타민족과의 결혼 금지 등이 우생학에 기반하였다.

  6. 비슷하게 흔히 다윈의 진화론 이후 무신론이 확산되었다고 알고 있는 경우가 많으나 무신론은 18세기부터 흔했고 다윈의 가족 중에도 무신론자가 있었다. 오히려 다윈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으며 후일 종교를 버리기는 했으나 그것은 “종의 기원” 발표 이후의 일이었다. 18세기부터 유럽에서 무신론이 확산된 것은 성서를 역사적, 객관적 비평의 대상으로 삼는 연구(성서비평학)가 발전했기 때문이었지 과학의 발달 때문은 아니었다.

  7. 진화생물학을 바탕으로 인간의 심리를 연구하는 분야이다. 예를 들어 마약이나 술은 현대인에게 큰 문제인데 많은 현대인들이 이를 알면서도 즐긴다. 왜 그럴까? 현생 인류가 생물학적으로 진화한 수렵, 채집 사회에서는 이런 성향이 전혀 문제가 안되었을 것이기에 자제력이 생물학적으로 진화할 틈은 없었을 것이다. 사람은 탄수화물, 지방, 부드러운 음식을 좋아하는데 이는 현대인에게 큰 문제를 가져다 준다. 왜 이런 성향이 생겼을까? 이런 성향이 영양이 부족했던 수렵, 채집 사회에서는 오히려 생존에 도움이 됐기 때문이다. 겨울 잠을 자기 전 곰이 연어의 껍질과 눈만 먹고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8. 이러한 주장을 하는 대표적 학자로는 Richard Lynn, J. Philippe Rushton, Edward Dutton 등이 있다. 이들은 실제 극우 성향 정치적 활동을 하는 경우도 있고 주류 진화심리학계에서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지는 않다.

  9. 많은 과학자와 과학철학자들이 진화심리학을 유사과학이라고 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과학자들은 관찰하고 그것을 토대로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는데 많은 진화심리학적 가설들은 검증이 불가능한 정도가 아니라 관찰에서부터 틀린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진화심리학자들의 주장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남성들이 생물학적으로 특정한 허리-엉덩이 비율을 가진 여성들을 선호하는 것은 그러한 비율을 가진 여성들이 임신과 출산에 유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주장의 관찰, 즉 남성들이 생물학적으로 특정한 허리-엉덩이 비율을 가진 여성을 선호한다는 것 자체가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것이다. 후속 연구들은 문화적으로 차이를 발견한 경우가 많다. 그러자 환경에 따라 달리 진화했기 때문이라는 임시변통의 설명을 끌어왔으나 사실 남성들이 선호하는 여성은 같은 문화권이더라도 역사적으로 변해왔다는 점에서 이는 생물학이 아니라 사회문화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쪽이 훨씬 편리할 것이다. 진화심리학자들의 많은 주장들이 과학적 엄밀성을 결여했고, 서양, 남성 중심의 편향성이 보인다는 주장에 대해 진화심리학자들은 과학적 가설일 뿐이라고 항변하기도 한다. 실제 진화심리학의 연구 대상은 충분히 중요한 과학적 연구 과제이고, 실제 유용한 결과들도 내놓았다. 인간의 심리가 생물학적, 계통적 제약이 있다는 주장 또한 아무런 문제가 없을 뿐더러 동의하지 않을 과학자가 있을까 싶다. 물론 여기에 바탕하여 과학적 가설을 세우는 것에도 아무런 죄가 없다. 하지만 과학적 엄밀성을 결여한 주장들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별 고민 없이 계속 내놓는다면 그것을 진지한 과학적 연구 프로그램으로 인정해줄 수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