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 문화 그리고 경제발전

오래 전부터 문화와 경제발전을 연결 짓는 사고 방식이 존재하였다. 특히 이러한 시각이 번성한 시기는 유럽이 세계의 패권을 쥐었던 시기이다.

유럽인들은 타지역에 대한 유럽의 우위를 서구 문화의 우수성 덕분으로 이해하였다. 반면 비서구의 문화는 주로 수동적이고 게으르고 비위생적이며 건실하지 못한 것으로 치부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서구가 나머지 세계를 일깨워야 한다는 제국주의적 시각으로 발전하였다.

문화의 차이는 선천적인 것이나 지리적 특성에 기인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오늘 날 학자들은 선천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을 구분하지만 그 당시는 아직 그러한 구분이 없었거나, 낯설던 시절이다. 따라서 문화의 차이에 대한 논의는 과학적 인종주의와도 다른 것이 아니었다.

문화에 대한 관찰은 주관적이다.

근대 한국과 일본을 바라본 서양인의 시선을 보면 당대 서구인들의 인상 비평은 일관되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잠시 머물다 간 서구인과 오래 한국인들과 교류한 서구인들의 시각 차가 크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문화에 대한 평가는 대단히 주관적인 것이므로 쉽게 단정지어서는 곤란하다.

오늘 날 문화인류학자들은 장시간에 걸친 현지 참여조사를 통해 문화를 파악하지만 19세기의 학자들 혹은 오늘 날 문화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은 단기간의 경험, 혹은 비체계적인 관찰, 남의 이야기 등을 통해 섣불리 문화에 대해 단정짓는 경향이 있었다.

19세기-20세기 초 많은 학자들은 안락의자에 앉아 남이 써 놓은 기록을 읽으면서 상상 속에서 다른 민족들의 문화를 평했다.

진화주의 인류학

진화주의 인류학은 19세기 모건 등을 중심으로 한 문화인류학의 한 흐름을 가리킨다. 모건은 안락의자 인류학자들과는 달리 뉴욕주 북동부에 있던 이로꼬이족을 장기간 체계적으로 관찰하여 초기 문화인류학자의 대표적 존재로 여겨진다. 하지만 단선적인 발전단계설을 주장했고 현재는 서구 중심주의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조하라.

문화는 변화 한다.

선천적인 것이거나 기후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변화에 따라 변화한다.

19세기 일부 서구인들은 일본인들이 게으르고 현실에 안주하는 성격이라고 기록하였으나 이런 평가는 불과 수십년 만에 변화하였다.

마찬가지로 1950년대 한국에서 전쟁에 참가했던 미군들은 한국의 미래에 대해 우호적인 평가를 내리지는 않았으나 불과 수 십 년 만에 한국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부지런한 민족으로 평가 받고 있다.

발전에 더 좋은 문화?

경제발전과 문화와의 관계는 일률적이지 않을 수 있다. 어떤 제도가 상황에 따라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좋은 제도와 나쁜 제도가 있기 보다는 환경에 적합한 제도와 그렇지 못한 제도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때 일본이 잘 나갈 때에는 서구 언론들이 일본문화의 우수성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일본이 장기 침체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자 서구 언론들은 일본 문화 때문에 그렇다고 조롱하기 시작하였다.

Audretch는 기계 기술이 중요했던 60년대까지는 소련의 기술 발전이 빨랐고 어떤 점에서는 미국을 능가하기도 했으나 70년대 전자전기 기술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미국에 완전히 뒤졌다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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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푸트니크 1호
1957년 발사된 스푸트니크 1호는 최초의 인공 위성이다. 소련이 최초로 인공 위성 발사에 성공하자 미국은 큰 충격을 받았다. 미국이 당시로서는 별다른 유용성이 없었던 달 착륙에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면서 서둘렀던 것에는 최초의 인공 위성과 최초의 유인 우주 비행을 소련에 빼앗겼다는 문화적 문제가 큰 역할을 했다. 후일 소련의 후신인 러시아는 코로나19 백신에 스푸트니크의 이름을 붙인다.

발전에 좋은 것이 더 좋은 문화인가?

발전에 더 좋은 문화가 있다고 해도 발전에 더 좋다고 해서 더 좋은 문화라고 말하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다.

물론 우리는 경제발전에 대해 논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수업 안에서는 발전에 좋은 문화가 더 좋은 문화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조작적 정의일 뿐이며, 앞에서 살펴보았듯 “발전”이라는 것 자체가 쉽게 정의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문화 상대주의와 팡글로시안 그리고 물질주의

두산백과 "문화 상대주의" 항목 중에서

세계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각 문화는 문화의 독특한 환경과 역사적·사회적 상황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견해다. 사회의 환경과 맥락을 고려하여 문화를 판단하는 것으로, 어떤 문화요인도 나름대로 존재이유가 있는 것이다. (중략)

도덕원리의 정당성 근거는 오로지 사회적 전통에 기초하며, 사회적 전통은 사회적 상황에 따라 변화할 수 있으므로 결국 그 정당성의 근거 또한 불변적인 것은 아니다.

문화 상대주의는 흔히 도덕적 상대주의로 이해되지만 일견 불합리해보이는 문화적 요소들이 그 사회의 자연, 경제적 조건 하에서는 합리적인 것일 수 있다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예를 들어 마빈 해리스는 인도의 소숭배가 일견 불합리해 보이지만 인도에서 소가 다양하게 이용되어서 고기로서의 효용보다 훨씬 높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인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그 사회의 자연, 경제적 조건 하에서 어떤 문화의 맥락을 이해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자세이지만 모든 관습, 문화가 최선의 선택 결과라는 팡글로시안적인 태도나 물질적 토대 때문에 선택된 것이라는 태도(신제도학파 혹은 Vulgar Marxism)는 경계해야 할 것이다.

마빈 해리스는 인도의 자연적, 경제적 환경에서는 인도의 소숭배가 최선의 선택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소의 효용성이야 한국의 전통사회에서도 중요하였지만 한국 사회에서 소는 숭배의 대상이 아니었다. 자연적, 경제적 환경과는 독립적인 문화 자체의 자율성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팡글로시안적인 태도는 진보를 부정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강한 의미의 낙관주의는 가장 강한 의미의 비관주의가 될 수도 있다. 현재의 상태가 최선이라면 꿈도 희망도 없는 것이니까. 다행히도 인도의 생활수준은 최근에 급격히 좋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