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산업의 여명기
1965년 첫 합작회사를 시작으로 주로 FDI를 통해 외국 기업들이 트랜지스터 및 IC를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graph LR; 설계 --> 제작 --> 테스트 --> 조립
반도체의 생산 과정은 회로설계, 제작(웨이퍼가공), 조립, 테스트의 네 공정으로 이루어지는데 회로설계와 웨이퍼가공이 제품의 질과 수율을 결정하고 이 부분은 주로 선진국에서 이뤄진다. 1960년대 이후 선진국 반도체 조립생산 시설이 개발도상국으로 이전하는데 이 때 한국에도 많은 직접 투자가 이루어졌다.
1970년부터 금성, 아남이 단독출자로 반도체조립을 시작했지만 설계, 웨이퍼 가공은 하지 않았으므로 기술능력 발전은 불가능하였다.
웨이퍼 가공을 목표로…
웨이퍼 가공을 목표로 한 최초의 업체는 1974년 설립된 한국반도체였다. 이는 미국에 거주하던 강기동이 한국에서 반도체를 생산하겠다는 개인적 신념 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한국반도체는 얼마안가 경영난에 빠졌고 이건희가 사재를 털어 이를 인수하였다. 당시 삼성그룹 회장이던 이병철은 신중한 성격으로 이건희의 조언에도 한국반도체를 인수를 거부하였다. 당시 반도체 산업에 뛰어드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다.
이 때 설립된 웨이퍼 가공 업체들은 결국 성공하지 못했고 다시 AT&T, 도시바 등의 외국기업과 합작으로 웨이퍼를 가공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80년대 초반까지 여전히 조립생산이 압도적이었다.
반도체 신화의 시작
1980년대 정부출연 연구소가 본격적으로 반도체 관련 연구를 시작하였고 82년 삼성을 시작으로 국내 대기업들이 본격적으로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기 시작하였는데 과감한 투자로 인해 위기도 겪었으나 끝내 성공을 거두어 오늘날 한국의 주력 생산품이 되었다.
이병철이 직접 밝힌 반도체 성공의 요인
- 경제적 타산이나 위험을 초월하여 국가적 견지에서 첨단기술에 도전한 확고한 기업 정신이 있었다.
- 부천 공장에서의 직접회로 생산 10여 년간의 경험과 인력의 축적이 있었다.
- 세계 경제가 호황으로 전환하여 반도체 산업에 활기가 되살아났다.
- 최신⋅최고이면서 최염가의 시설을 설치할 수 있었다.
- 재미 한국인 박사들의 사심 없는 조국애에서 비롯된 적극적인 참여로 고도의 두뇌 집단과 기술 인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 여자 종업원에 이르기까지 양질의 근면한 노동력 확보 및 훈련이 가능했다.
- 어려운 입지 조건에 적합한 부지를 얻을 수 있었다.
- 긴축정책 속에서도 각 금융기관의 각별한 이해와 협력을 얻어 소요 자금을 순조롭게 조달할 수 있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는데 삼성은 64K 디램 양산에 성공한 후 당시 대세였던 128K를 건너 뛰고 아직 몇몇 선도업체만 성공한 256K로 바로 뛰어들어 성공하고, 10개월만에 1M 개발에 성공한다.
삼성이 1984년에 64K DRAM을 개발하여 양산하려할 때 불행히도 당시 디램 시장이 불황에 빠져들어서 모든 기업이 적자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삼성은 1M 디램 개발과 공장 건설을 포기하지 않고 밀어붙였고 공장이 완공될 때 쯤에는 호황이 찾아와서 삼성에게 막대한 이익을 안겨주었다.
권오현 전 부회장의 회고
삼성은 한마디로 존재감이 없던 전자 회사여서 입사해야겠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습니다. 1983년 호암이 반도체 사업에 진출한다는 ‘도쿄 선언’ 소식을 미국에서 전해 들었는데 국내외 정책기관들 모두 회의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실리콘밸리 삼성연구소에서 접촉이 왔습니다…하지만 ‘삼성이 제대로 하겠나?’ 하는 생각에 거절을 했죠. 그런데 지속적으로 접촉이 왔습니다…‘4M를 개발했으면 좋겠다’는 거에요. 귀가 솔깃해졌지요…
‘재밌겠는데?‘하는 생각이 들었어요…한마디로 지적 호기심이 저를 이끌었다고 할까요. ‘과연 될까? 할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도 있었지만 일단 해보자는 마음으로 조인하게 됐는데 이렇게 오래다니게 될 줄 몰랐습니다…
그때 사무실 벽에 붙은 구호가 ‘한반도는 반도체다.’…모든 삼성반도체 임직원들은 아침마다 ‘반도체인의 신조 10개’ 항목을 외치고 일을 시작했어요…
아침마다 함께 구호를 외쳤다는 게 지금 생각하면 무슨 군대냐 하겠지만 이런 단순한 것에 힘이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Note
권오현 전 부회장의 회고에는 반도체 산업의 특성, 문화의 중요성, 기술자들의 비경제적 유인, 기술 혁신의 불확실성 등 많은 것이 담겨있다.
더 자세한 것은 기술혁신의 경제학 시간에 만나요…
이후 반도체 산업의 기술능력 축적은 주로 국내 대기업에 의해 독자적으로 추진되었고 국가의 역할은 크게 줄어들었다. 외국과의 기술협력에서도 일방적인 기술 도입에서 벗어나 크로스 라이선스, 공동개발 등으로 제휴 형태가 다양화되었다.
FDI의 중요성과 한계
한국 반도체 산업의 발전 과정은 FDI의 중요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반도체 산업의 경험이 전무했던 1960년대 저렴한 인건비를 찾아 선진국 반도체 업체들이 한국에 공장을 유치할 수 있었다. FDI를 통한 생산 경험은 국내 반도체 조립 경험 인력을 육성하는 측면에서 기여한 바가 있으나 이것이 후일 반도체 설계, 웨이퍼 가공 단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70년대 후반 합작을 통한 웨이퍼 가공을 통해 관련 인력들이 경험을 쌓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질적 도약은 합작투자로부터 시작되지는 않았다. 반도체 설계와 웨이퍼 가공능력을 확보하기 위해 재벌계 독자 회사들은 대규모 투자의 위험을 감당해야만 했다.
FDI는 결국 고부가가치 단계에 이르지 못했고 오히려 생산기술의 변화와 국내 인건비 상승으로 더 이상의 비교우위가 사라지자 국내에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